백영웅전 - 리뷰

심장이 뛰는 정통 RPG의 낭만적인 영웅담

백영웅전이 전하는 영웅담은 심장을 뛰게 만들기 충분했다. 20대인 나로서는 실시간으로 환상수호전 시리즈나 동시대 JRPG를 즐긴 추억도 없으며, 2020년 당시 460만 달러 달성으로 화제가 되었던 킥스타터 캠페인에 참여한 전 세계 4만 6천 명의 후원자 중 하나도 아니다. 심지어 정통 JRPG를 처음 경험하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백영웅전은 경이로웠다. 언제나처럼 게임을 클리어하면 보는 엔딩 크레딧일 뿐인데, 백영웅전은 문자 그대로 전율이 흐른다는 감각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다시는 이런 RPG가 나올 수 있을까? 불현듯이 떠오른 질문에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된 시점에서 답하자면, 아마도 불가능하다고 본다.

백영웅전은 첫인상부터 나에게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빠른 이동이 불가능한 RPG가 있다는 것에 당황스러웠고, 모험 도중에 파티 편성을 바꿀 수 없어 전투 전 정비를 위해서는 반드시 여관을 방문해야 하는 점, 회복 아이템을 잔뜩 챙겨가기에는 가방의 양이 너무나 작고, 수시로 벌어지는 전투 속에 동료들은 여관에 갈 때쯤이면 늘 빈사 상태였다. 전투 중에 몇 번이고 쓰러질지라도 숨은 붙여둔다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일 정도로, 처음은 말 그대로 정통 JRPG 스타일이 무엇인지 직접 배우는 시간에 가까웠다. (반면 턴제 커맨드식 전투 자체는 버젓이 자동 전투 기능을 지원한다) 그렇다고 피도 눈물도 없는 게임은 아닌데, 의외로 주인공이 쓰러져도 파티가 전멸하지 않는 이상 계속 진행할 수 있다.

핵심 크리에이터 무라야마 요시타카는 생전 인터뷰에서, 백영웅전이라는 제목을 선택한 이유로 각기 다른 분야에서 힘을 발휘했던 작은 영웅들이 모여 커다란 역사로 흐르는, 우리 주변에서도 뜻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은 모두 영웅이라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대부분의 RPG 주인공은 완벽한 초인이고, 동료에게 도움을 받기보다 그들을 이끄는 위치에 더 가까우며, 백영웅전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게임이라고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백영웅전의 주인공은 완벽한 초인이 아니며, 정의로운 마음에 불타 싸움은 잘할 수 있지만, 혼자서 전쟁을 끝낼 수 없다. 창고를 관리하는 일부터 군사를 훈련하거나 건축하는 등 다양한 능력을 갖춘 영웅들의 도움이 필요하며, 주인공이 도움을 받는 것처럼, 플레이어도 그러한 영웅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더 나아가, 앞서 백영웅전이 킥스타터 캠페인을 통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게임이라는 배경을 병치하면 발견할 수 있는 크나큰 감동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백영웅전의 ‘빠른 이동’은 순간이동 능력을 갖춘 영웅을 영입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용할 수 있는데, 다른 게임에 비하면 등장하는 시기가 늦은 감이 있다. 그러나 정통 JRPG의 문법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입장에서 볼 때, 전후 관계를 뜯어보면 RPG 개발자들의 노련함이 묻어나오는 치밀한 설계라고 본다. 빠른 이동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낭만이 무엇인지 게임에서 충분히 보여줄뿐더러, 도시 건축이나 공성전을 진행하면서 플레이어에게 동료가 필요하다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다.

백영웅전이라는 이름대로 100명의 영웅과 조우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 이상이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킥스타터 캠페인의 후원자들도 게임의 영웅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공성전 도중 함께 싸운 후원자들의 이름이 스쳐 지나가고, 마을에서 만나는 NPC나 반려동물의 이름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게임 시스템적으로 비중이 크지 않지만, 크리에이터의 인터뷰를 다시 생각해 보면 백영웅전을 완성하는데 큰 힘을 발휘한 현실의 영웅들도 플레이어와 여정을 함께 한다는 뜻이다. 무수히 스쳐 지나가는 엔딩 크레딧 속 그들이 없었다면 백영웅전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인고의 끝에 만들어진 게임과 그걸 가능케 한 현실을 꿰뚫는 영웅담에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고전 감성을 살린 2.5D 그래픽은 평면적인 느낌이라 처음에는 큰 감흥을 받지 못했지만, 카메라워킹을 통한 입체적인 경험과, 마을 밖을 벗어나면 3D 그래픽으로 구현된 구역이 아니라 캐릭터가 지도 위를 걸어 다니는 설계, 이동하는 위치에 따라 서서히 변하는 카메라워킹을 통해 숨어있는 동료나 아이템을 찾을 수 있는 모습이 새로운 체험으로 다가왔다. 더해 전투에서는 6명의 영웅이 행동할 때마다 카메라워킹에 변화가 생기며, 평면적일 수 있는 액션을 카메라워킹으로 다양한 시각적 요소를 경험하게끔 끌어올리는 점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주요 3인방 중 하나인 세이가 스킬을 사용할 때 핑거 스냅으로 검을 소환하는 연출은, 세이의 손에서 소환된 칼날로 카메라가 이동하면서 손가락을 튕기는 사운드가 들리면, 카메라도 발을 맞춰 대담하게 뛰어드는 캐릭터를 비춘다. 이 과정에서 대사만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낭만을 엿볼 수 있었다. 평소 과묵했던 캐릭터가 모두를 지키기 위해 불타는 투지를 해방하는 느낌을 받았으며, 또한, 100명의 영웅마다 전략적으로 영웅콤보를 사용할 수 있는데, 전투에서 서로 다른 조합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운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 게임은 캐릭터 간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1 대 1 전투가 발생하는데, 평소 전투와 달리 취할 수 있는 전략이 3가지로 제한된 눈치싸움에 가깝지만, 백영웅전의 드라마를 극대화하는 무대장치이기도 하다. 여기서 사운드는 비장한 순간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공격과 비교적 안전한 카운터에서는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공세를 펼칠 때 게임의 사운드도 일격을 날리는 흐름에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지금까지 정통 JRPG의 낭만은 스토리나 그래픽이라고 생각했는데, 백영웅전을 통해 확실히 깨달았다. 게임의 모든 요소의 시너지가 중요하고, 거기에서 소위 말하는 낭만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대사로는 전할 수 없는 결전의 상황을 표현하는 사운드처럼 말이다. 이 또한 백영웅전을 구성하는 영웅담이라고 생각한다.

평결

정통 JRPG의 낭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작품. 종족과 이해관계도 서로 다른 백인 백색의 영웅이 함께 힘을 합치는 군상극은 그 자체로 감정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영웅들의 도움을 받아 도시를 개발하거나 공성전을 치르는 등, 이 게임에서 영웅들의 존재는 혼자서 해낼 수 없는 것을 도전하게 하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며, 다양한 영웅들과 성장 속에 화려한 2.5D 그래픽과 전투를 입체적으로 만드는 카메라워킹은 눈이 즐겁고, 비장한 1 대 1 전투 상황을 고조시키는 사운드 연출은 귀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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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웅전

Rabbit & Bear | 2024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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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웅전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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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terpiece
다시는 나오기 힘들다고 느낄만한 모습의 낭만적인 정통 JRPG.
백영웅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