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레인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 남상규 인터뷰

남상규, 폭스 레인저를 회고하다

'유의미한 상업적 히트를 기록한 최초의 국산 오리지널 PC 게임'이라는, 기념비적이고도 입지전적인 전설을 세운 1992년작 슈팅 게임 폭스레인저(Fox Ranger)가 올해 30주년을 맞이하였다.

폭스레인저를 제작한 소프트 액션의 남상규 대표가 이제야 밝히는 폭스레인저 시리즈와 소프트 액션의 90년대 행보 뒤의 숨겨진 이야기들, 초기 국산 PC 게임업계의 풍경, 그리고 성공과 실패가 교차하는 그의 개인사를 들어보자.

80~90년대 국내 게임산업 초창기 명사들의 증언과 개인사를 듣는 인터뷰는, 이 테마에 많은 관심을 공유하고 있는 월간 게이머즈와 공동 기획으로 진행 중이다.

폭스레인저 이전의, 그의 삶과 일

IGN, 월간 게이머즈: 사실 저희 연배인 40대 초 언저리는 되어야 아마 남상규라는 이름에 반응하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만, 폭스 레인저는 그래도 이른바 '최초의 국산 PC 게임'으로서 자주 언급되는 편이기에, 그 게임을 만든 사람이라 하면 조금은 더 와 닿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상규: 반갑습니다. 이렇게 인터뷰 같은 걸 해보는 게 꽤 오래간만이네요. 90년대 한창때는 게임잡지 기자들이 회사에 매일같이 찾아와서 인터뷰도 하고 사진도 찍어가고, 아예 밥도 해 먹고 자고 가기까지 했을 정도였는데(일동 웃음). 저는 폭스레인저 시리즈의 개발사인 소프트 액션의 사장을 맡았던 남상규라고 합니다. 빅콤 박기혁 사장님의 진심 어린 설득 끝에, 폭스레인저의 리패키지 재발매 및 폭스 레인저 IP 부활을 홍보하는 데 기여하고자 다시 얼굴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월간 게임월드' 1991년 8월호 게임음악 특집기사에서 발췌한 인터뷰 기사의 일부

90년대 초두 국내 게임업계 초창기부터, 여러 게임잡지에 일본 게임음악 관련 기고를 도맡아 하면서 한국에 '게임음악'이라는 장르를 알리기 위해 선구적으로 노력하셨죠. 그래서 당시부터 게임을 즐겨하던 40대 올드게이머들에겐 지금도 존재감이 매우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본제인 폭스레인저의 회고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게임 개발자와 대중음악 종사자로 활동하게 되는 계기가 될 어린 시절부터 먼저 회고해주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 올드게이머 입장에서 남상규 씨가 폭스레인저의 개발자로서는 잘 알려졌지만, 그 이전의 커리어인 대중음악 편곡이나 폭스레인저의 밑바탕이 된 비디오 게임 경험 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까지의 사회상과도 연관 지어 회고를 듣고 싶기도 하고요.

어린 시절부터 얘기할까요……. 사실 ‘게임 개발’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매우 간단해요. 어릴 적부터 일찍부터 게임을 접했고 정말 몰두하다시피 했거든요. 대중음악이나 그런 걸 떠나서, 대략 중학생 시절부터 게임에 미쳐 살았었죠.

1966년생이시니까, 중학생이면 대략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가 되네요. 한국에 본격적인 오락실 문화가 형성되기도 전부터 비디오 게임을 접하셨던 거군요.

일단, 제 형이 APPLE Ⅱ 컴퓨터를 갖고 있었어요. 그 시절에. 다만 그때의 저는 애플용 게임이 그래픽도 별로고 해서 그리 좋아하진 않았고……(일동 웃음). 저는 '퐁'과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실시간으로, 실기로 접한 세대에 속해요. 그땐 오락실이라는 업소 형태가 명확히 잡혀있지 않아, 당구장이나 문방구 등에서 손님 접대용으로 테이블형 기기를 들여놓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죠. 어릴 적 동네 당구장에 인베이더가 들어왔는데, 당시 당구장에 드나들던 어른들이 게임을 모르니 수입이 시원치 않았나 봐요. 구석에 먼지를 먹고 있다가, 마침 당구장을 다니던 제가 궁금해서 물어보니 주인아저씨가 "왜, 사게?" 하시는 거야. 금액을 들어보니 모을 만하겠다 싶었죠. 그래서 반년간 열심히 돈을 모아서 아예 기체를 사버렸죠(웃음). 당연히 방치돼 있던 물건이라 상태가 안 좋았던데다, 막상 사놓고 보니 집에는 놓을 곳이 없고 부모님께 들키면 안 되겠고. 다행히 집이 주택이어서 창고는 있었기에, 거기에 자리 만들고 갖다 놓은 후 잘 고쳐서 몰래몰래 숨어 게임을 했죠(웃음).

…어떻게 잘 가져오셨네요.

당연히 반년쯤 뒤에 걸려서 엄청나게 얻어맞고(일동 폭소), 기체는 박살이 났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깝죠.

극초기의 아케이드 게임은 오락실이 아닌 다방 등의 업장에서도 서비스할 수 있도록 테이블형(tabletop)인 경우가 많았다. 사진은 당시 실제 기기가 아닌, 영국 Games Room Company가 원형에 따라 복각 제작해 판매 중인 레플리카다

어릴 적엔 계속 비디오 게임의 발전과정과 함께 살아오셨겠군요.

그렇죠. 오락실엔 그냥 살다시피 했고, 메가 드라이브도 일찍부터 접했고. '슈퍼 시노비'와 '썬더 포스 Ⅲ'를 처음 즐겼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어요. 일단 게임 자체가 재미있어서 노 미스 클리어가 가능할 만큼 파고들었고, '이런 게임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이런 게임의 음악을 만들고 싶다'라는 욕구의 원점이 됐죠. '왜 우리는, 우리나라는 이런 게임을 만들 수 없을까?'라는 의문도 가지게 됐고요. 슈퍼 시노비의 음악을 제작한 코시로 유조(Yuzo Koshiro) 씨는 게임음악이란 장르를 제게 알려준 스승 격이 되었죠.

그럼 일단 '게임'에 대해선 잠깐 여기서 멈추고, '음악'을 하시게 된 계기는 어떻게 되는지요?

음악을 시작한 것도 중학교 때부터였어요. 그때 다들 그랬듯 처음엔 취미 삼아 시작했는데, 대부분은 취미로 오랫동안 즐기다 프로가 되던가 그만두든가 하잖아요? 저는 일렉트릭 기타를 파고들었는데 정말 마음에 들어서, 나는 이걸 직업으로 삼겠다 마음먹었어요. 내 인생의 직업은 음악이라고, 고등학교 때 방향을 잡아버린 거죠.

통기타가 일세를 풍미하던 시절에 일렉트릭 기타라니, 흔치 않은 방향성이기도 하네요.

당시는 일렉트릭 기타 연주자가 귀하던 시절이니까, 자연스럽게 음악계 프로 선배들도 많이 알게 되었고 이런저런 기회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밴드… 그땐 '그룹사운드'라고 했는데, 대타나 세션이 필요할 때 불러주시기도 하고, 콘서트에 참여하기도 하고. 당시 유명했던 '신촌블루스'와 함께 전국투어를 돌기도 했었죠.

그런데 활동을 하다 보니, 이거론 생계를 꾸리기 힘들다는 걸 알았어요. 공연이 꾸준히 있으면 몰라도, 항상 그렇진 않거든요. 수입이 너무 불규칙해서, 그때가 20대 초반이었으니까 '20년 뒤 40대가 될 때까지 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고 진지하게 생각해봤죠. 이걸로는 안 되겠다, 하지만 음악을 버리지 않을 거라면 나이를 먹고도 꾸준히 할 수 있는 분야를 개척해보자……라는 결론에 도달했죠.

대중음악 현장에서 보니, 나이 먹어도 대접받을 수 있을 만한 분야가 바로 '편곡'이었어요. 당시엔 작곡자보다 편곡자가 더 우대받았거든요. 작곡자가 아무리 좋은 멜로디를 만들어도, 무대와 유행에 맞춰 편곡자가 멋지게 포장해 곡을 '완성'해야 상품이 되는 거죠. 그래서 편곡자가 받는 개런티도 상당했어요. 그래서 편곡을 또 독학으로 공부했죠. 그 과정에서 남들보다 일찍 전자음악과 컴퓨터 음악, 즉 MIDI를 접했고, 장비와 기술을 갖춰가게 됐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현명한 결정이었네요.

대략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여러 대중음악 앨범들의 MR(반주 음원)을 만들어주면서 기획사들과 관계해왔어요. 당시 한국 대중음악계 한복판에서 구르다 보니 별별 황당한 일도 많이 겪었지만(웃음)……. 전자음악은 비싼 장비를 계속 사들여야 해서 돈이 많이 드는데, 마침 그때 '옥경이'로 대표되는 트로트가 일대 붐이었다 보니 저와 맞지 않는 장르의 편곡 일감을 계속 맡아야 했던 등으로, 돈은 벌리긴 벌리는데 심적으로는 꽤 지치기도 했었죠.

1990년, 폭스레인저를 개발하다

이제부턴 슬슬 '게임 개발' 쪽으로 얘기를 넘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이제 더 못 하겠다' 싶어서, 잠시 대중음악 일을 줄이고 일본이나 미국의 게임음악 중 인상적이다 싶은 곡들을 제 나름대로 편곡해보는 일종의 취미생활을 병행했어요. 휴식 삼아 게임기도 이것저것 만져보고. 그러다 보니 '게임을 만들고 싶다', '게임음악을 만들고 싶다'라는 오랜 욕망이 다시 솟아오르게 된 거죠.

말하자면, 그때 폭스레인저의 역사가 시작된 거네요.

예. 당시엔 한국에 '게임 개발사'는커녕 '게임업계' 자체가 없었으니까, 이미 만들어지는 게임에 음악 스태프로 참여한다는 건 불가능했죠. 당시는 XT와 286 컴퓨터가 막 보급되는 시기였고, 잡지들도 '왜 한국은 일본이나 미국처럼 국산 게임을 만들지 못하나?'라는 문제를 제기하곤 했어요. 마침 PC통신인 KETEL(하이텔의 전신)에서 활동하고 있었기에, 게임제작 동호회 '개오동'을 통해 뜻있는 아마추어 개발자들을 모아 팀을 꾸렸죠. 그때의 주축이, 당시 포항공대 기계공학과 재학 중이었던 김성식(이후 단비시스템을 창업해 독립)ㆍ이장원 씨였어요. 선후배 관계인데, 게임 프로그래밍에 일가견이 있었죠. 제가 그래도 사회인에 연장자니까 팀장 비슷하게 됐고요.

일단 슈팅 게임으로 장르를 잡고, 당시 제가 제일 좋아했던 썬더 포스 Ⅲ를 모델로 삼았어요. 그땐, 설령 모방이라도 좋으니 일단 뭐라도 국산 게임이 처음 나와 주는 게 중요했던 시기였지요.

'월간 마이컴' 1991년 5월호 특집기사를 통해 공개됐던 개발 초기의 폭스레인저 타이틀 화면. 완성 후와는 이미지가 꽤 달라서 이채롭다

비슷한 시기에 '월간 게임월드 창간 1주년 카세트테이프'를 기획ㆍ제작하셨죠. 아마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내놓으신 첫 독집 프로젝트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것도 뒷얘기가 많은데……(일동 웃음). 여러 잡지에 기고를 많이 하다 보니 오퍼가 들어왔는데, 사실 (저작권이 엄격한) 지금 같으면 못 나올 음반이지만 그땐 사회적으로 그런 개념이 없었으니까요. 자신 있는 일이니까 맡긴 했는데, 예산을 너무 터무니없이 낮게 준 거예요. 게다가 곡 자체는 내 장비로 다 만들 수 있지만, 마스터 테이프 녹음만큼은 녹음실을 빌려야 하잖아요. 일단 그것도 돈인데다, 심지어 마침 그때 아는 녹음실들은 예약이 다 찼더라고요. 납기일도 빡빡하게 잡혀서 시간이 없어 깨질 상황이었는데…….

그때, 마침 제 대학 시절 음악 선배 한 분이 sm엔터테인먼트의 녹음기사로 근무 중이셨어요. 연락해보니 "새벽이면 된다. 자정 넘겨서 와라"라고 하셔서, 급히 기자재 들고 새벽에 밤새 작업한 다음 돌아와서 쓰러져 잤죠. 오후에 간신히 일어났는데, 처음 듣는 목소리의 전화가 왔어요. "남상규 씨야?" 하는데 '뭐야, 이 사람'이란 느낌으로 받아보니, 알고 보니 sm의 이수만 사장님이었죠(일동 폭소).

이수만 씨! (대폭소)

지금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그때도 음악계에서 대단한 사업가였어요. "자기 녹음실에서 녹음해갔다는 걸 알고 우연히 들어봤는데 마음에 들었다. 나와 같이 일해보자." 저야 거절할 리가 없죠. 그게 인연이 돼서 현진영 2집 등의 sm 쪽 쟁쟁한 음반에 많이 참여했어요. 그 과정에서 SBS 창사 초기의 로고송 공모에 sm 명의로 참여해 제 곡이 채택되기도 하고. '기쁨 주고 사랑받는 SBS'의 그 멜로디가, 제 작업물이죠.

이야, 음악적으로는 꽤 성공하셨네요.

이수만 씨는 이후에도 여러 일을 흔쾌히 맡겨주셔서, 지금도 은인으로 여기고 있어요.

지금은 전설이 된 월간 게임월드 창간 1주년 기념 게임 배경음악 앨범. 기록상 한국 최초로 게임음악만을 수록한 음반이다. 정규 발매품이 아닌 잡지 부록이지만, 그 의미는 크다. 남상규 씨의 이름을 게이머들에게 깊이 각인시킨 앨범이자, 발매되기도 전인 폭스레인저의 메인 테마곡이 소개된 앨범이기도 하다

그 인연을 만든 게 게임월드 1주년 테이프라니(웃음). 폭스레인저는 그동안에도 계속 제작하고 있었겠군요.

예. 우리 팀이 개발할 당시만 해도 IBM PC로 가정용 게임기 급의 게임을 개발하는 노하우나 라이브러리가 사실상 거의 없다시피 해서, 모두 바닥부터 기술을 축적해야 했어요. 스프라이트 표시부터 라인 스크롤, 다중 스크롤 흉내 내기, 256컬러 그래픽 구현, MIDI 사운드 지원 등등……. 소프트 액션과 비슷한 시기에 창업한 회사의 개발진들이 저희를 찾아와 기술을 물어가는 경우도 많았죠. 저도 아낌없이 다 공유해줬고요.

뭐, 그 와중에도 사실 외주로 음악 일은 계속하고 있었으니까……. 당시엔 저도 본업은 음악이었고 게임 개발은 취미활동이라는 느낌이 강하긴 했어요.

본격적인 회사 형태라기보다는, 느슨한 원격 협업이었겠군요.

핵심 프로그래머 두 사람이 대학생, 그것도 포항공대니까 방학 때 서울로 올라와 작업하거나 하는 식이었죠. 제가 게임 경험이 많으니 외국 게임을 보여주면서 이런저런 기술이나 효과가 필요하다고 하면, 두 사람이 실제 프로그램으로 구현해주는 형태였어요. 286에서 돌아가야 하니 결국 정공법으로 구현하기엔 스펙이 모자라서, 대부분은 눈속임이나 편법이었지만요.

그래도, 폭스레인저가 발매되는 92년 중순 당시엔 '국산 게임이 이 정도까지 하다니!'라는 찬사가 나올 정도였지요,

게임기에서나 보던 효과들이 점점 눈앞에서 완성되고 1스테이지 2스테이지 하나씩 구체화해 가니까, 다들 의욕이 충만했죠. 실은, 게임 자체는 이미 91년 말쯤엔 사실상 완성 단계였어요. 문제는 유통인데, 당시엔 단 두 회사만 PC 게임을 유통하고 있던 시기니까 두 회사 중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한 회사가 저희와 딱히 협의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계약 확정된 것처럼 인터뷰를 내더니만, 실제로 계약 얘기를 하러 방문해보니 말이 바뀌는 거예요. 이 회사는 신뢰할 수 없다 싶어서 결국 다른 회사를 택했죠. 여기도 그리 조건이 좋지는 않았지만(웃음), 당시는 물밑에서 여러 회사가 '최초의 국산 게임' 타이틀을 따내려고 뛰던 시기였기에, 금액보다는 '일단 제일 빨리 내는 길'을 택하기로 했죠.

폭스레인저의 커버아트. 유명한 오프닝 테마곡 'Last Guardian'은 이후 여러 TV프로가 BGM으로 사용했기에, 게임은 몰라도 들으면 바로 알아볼 사람이 많을 듯. 당시 시점에서는 볼륨과 완성도가 충분했기에, '국산 PC 게임 시대의 개막'을 갈망하던 유저들의 주목을 받아 크게 히트했다. 이 작품이 지금도 '최초의 국산 PC 게임'으로 널리 기억되는 이유다

그렇게 해서 1992년 4월 20일이 발매일로 된 거군요.

나중에 알았는데, 유통사들이 높은 개런티를 꺼린 것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어요. 당시 유통사에서 팔았던 게임 중 제일 잘 팔린 타이틀 기록이 고작 1,800장이었다고 해요. 그러니 '2천 장을 팔면 우리 입장에선 대성공이다. 하지만 아무리 국산 게임이라 해도 2천 장이 팔릴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논리였죠. 그래서 1,500장을 MG(미니멈 개런티)로 하되, 대신 경쟁사가 5월에 첫 국산 게임을 낸다는 소문이 있었기에 우리 게임은 무조건 4월에 내주었으면 한다는 조건으로 수락했죠.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인 선택이었네요.

그렇게 되었죠. 돈은 얼마 받지 못했지만 일단 우리는 이 게임을 어떻게든 세상에 내고 싶었던 거고, 발매 성적도 유통사 말로는 첫 달에 15,000장, 최종적으로는 25,000장을 넘겼다고 들었어요. '국산 게임의 상품가치'를 드디어 실적으로 인정받은 거죠. 받은 개런티는 대부분 최신 486 PC 등의 개발 장비를 들이는 데 썼어요. 486 한 대가 250~300만 원 하던 시절이었죠.

결국 좌초되고만 '폭스레인저 2'

어쨌든 기념할 만한 일보를 내디디신 거군요.

게임 개발을 계속해보자는 원동력이 생긴 거죠. 최신 486으로 장비를 교체하고 한 200만 원 남았나……. 그걸로 회식하고, 사업체가 되니 팩스 보낼 일이 많아져서 팩스 들이고 책상 맞추고 해서 개발실 형태로 대충 꾸미고 나니까 돈이 딱 떨어지더라고요(웃음). 그때도 '그 정도로 히트한 게임을 만들고도 고작 이 돈밖에 못 받았나'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아직도 그때의 계약서를 증거 삼아 간직하고 있어요(일동 웃음).

일단 국산 게임의 상품성은 증명됐으니, 유통사에선 안달이 났겠네요.

놀랐죠. 이후부터는 다음 작품에 대한 성화가 심해졌고(웃음). 사실 '박스레인저'는 폭스레인저 개발이 거의 완료된 91년 말 시점부터 이미 만들고 있었기에, 비교적 빨리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박스레인저도 최종적으로는 15,000장쯤 나갔다고 들었죠. 하지만 연속으로 히트작을 냈는데도 개발사를 신뢰하지 않고 여전히 '다음 작품에선 올려주겠다'라는 식이어서, 그게 다음 작품부터 유통사를 바꾸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됐죠.

박스레인저(1992년 11월). 1편과 동일한 엔진으로 구성요소를 리뉴얼해 제작한 일종의 스핀오프 셀프 패러디작으로서, '국내 최초의 PCM 음성출력 지원 게임'과 '개발자의 사진을 디지털 스캔해 적 캐릭터로 사용한 최초의 국산 게임'이란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이후의 소프트 액션 작품들은 유통사가 계속 바뀌게 되죠.

온갖 회사를 거치면서 상처도 많이 입고 좌절도 컸어요. 그래도 폭스레인저가 당시 게이머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던지,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까지 보따리 들고 무작정 우리 회사로 찾아와서 '게임을 개발하고 싶다'라고 눌러앉는 학생이나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나왔죠. 그땐 아직 회사라기보다는 팀이란 느낌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계속 늘어가니까 개발하고 싶다는 게임이 있으면 해보라고 프로젝트를 만들어주는 식이었어요. 그렇게 여러 프로젝트가 돌아갔죠. 메인은 '폭스 레인저 2'와 '어디스'였지만.

'승천대한'이란 격투 게임도 당시 개발 중이셨죠. 결국 이름만 남고 개발이 중단됐지만요.

그것도 뒷얘기가 있어요(웃음). 사실 당시 PC에서 오락실 급의 격투게임은 너무 기술적 장벽이 높다고 판단해서, 저는 '486이면 몰라도 286에선 무리'라고 반대했어요. 그런데 프로그래머가 가능하다고 밀어붙여서, 프로젝트를 허용해줬죠. 그런데 예상한 대로 기술적으로 무리였고(일동 웃음), 결국 유야무야됐어요.

어디스와 폭스레인저 2는 상당히 이른 시점부터 여러 개발 화면이 공개됐었는데요.

그것도, 뭔가 구체적인 홍보계획을 잡고 공개한 게 아니었어요. 그땐 저희가 여러 잡지와 언론의 주목을 받다 보니 매일같이 인터뷰에 시달리기도 했었는데, 친한 잡지 기자들이 아예 개발실로 놀러 와서 식사하고 자고 가기까지 할 정도였죠. 그러다 보니 '기사 만들어야 하니 화면이라도 하나 찍어가자'는 요구도 많아져서, 그런 식으로 본의 아니게 나간 정보가 상당수였어요.

폭스레인저 2는 1편이 크게 성공했다 보니 기대감이 매우 높았죠.

그렇게 공개된 쪽정보로도 기대치가 워낙 높아서 부담될 정도였어요. 그런데 정작 유통사 협상에서는 여전히 우리 요구가 제대로 통하지 않았죠. 이번엔 이 정도지만 다음엔 원하는 금액으로……라는 이야기가 계속되는 데 질려서, 결국 유통사를 바꿨어요. 그런데 그것도 결과적으론 악수가 되었고, 그 외에도 악재가 여럿 겹쳤죠.

지나고 보면 폭스레인저 2는 여러 면에서 참신한 시도나 기념비적인 시도는 많았는데, 퀄리티 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그냥 내보내 버렸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결국 소프트 액션의 아성에 큰 흠집을 낸 결과로 끝나버렸죠.

당시 오프닝 데모를 만든 사람이 추천받아 기용한 고등학생이었는데, 센스가 상당해서 주문한 우리 의도 이상으로 뛰어난 퀄리티로 나왔어요. 하지만 그땐 학생이어서 직원으로 채용할 수도 없고 계약을 맺을 수도 없으니, 논의 끝에 486 PC 한 대를 맞춰주는 쪽으로 얘기하고 데모를 받았죠. 이후 본편을 한창 제작하는데, 제가 떼어먹은 것처럼 이상한 소문이 나더라고요. 게다가 완성이 눈에 보이던 시점에서, 핵심 프로그래머가 돌연 잠적한 게 치명적이었어요. 이대로는 도저히 납기를 맞출 수 없다고 판단해 제발 발매일을 3개월만 미뤄달라고 유통사를 설득했지만, 요지부동이더군요. 위약금 차원에서 계약금을 절반으로 깎겠다고까지 했는데, 무조건 납기일에 소프트를 가져오라는 거예요. 음악 활동할 때보다 훨씬 스트레스가 컸던 시기였어요. 어쩔 수 없이, 그냥 게임을 낼 수밖에 없었죠.

이후 패치 디스크를 배포하는 등, PC통신에서 한바탕 큰 난리통이 났었죠.

PC통신은 물론이고…… 저희 회사가 '꺾였다'라고나 할까. 그냥 모든 걸 다 잃은 거죠. 하루하루가 정말 힘들었어요. 본업이 음악이니까 저 개인이 먹고사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지만, 제 자존심이었던 게임을 그렇게밖에 낼 수 없었던 게 큰 상처로 남았어요.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고……. 소송 자체는 이겼지만, 별로 위안이 되지는 않았죠. 게임을 개발하면서 제일 심정적으로 힘들었던 기간이라고 기억해요.

국산 PC게임계의 정상을 달리던 소프트 액션의 위광이 꺾이는 분기점이 되고 만 폭스레인저 2 : 복수의 외침(1993년 4월). 횡스크롤ㆍ종스크롤ㆍ유사 3D 등 다양한 기술적 시도를 넣었지만,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의 버그와 미완성된 부분이 속출해 유저들의 원성에 시달려야 했다

'어디스'와 '폭스레인저 3', 그리고 휴업에 이르기까지

한동안 개발에 의욕이 없으셨겠군요.

그냥 음악이나 해야겠다…… 싶어서 게임 개발에서 의식적으로 좀 거리를 두기도 했었어요. 그런데도 회사에 계속 남아준 개발진이 있어서, 어떻게든 추슬러 '어디스'는 완성해보자는 식으로 다시 움직였죠. 가족들은 그렇게 게임에 데여놓고 그냥 음악이나 하지 왜 또 고생이냐고 말렸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라 '여기서 멈추면 진다'라는 오기가 들었달까요.

어디스는 이미 슈팅 붐이 다 지나가고 RPG가 인기 장르가 된 시점에야 나왔기에, 결국 아쉬운 결과로 끝났지요. 난이도가 너무 어려웠던 것도 문제랄까…….

그 게임도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난이도는… 되돌아보면 그 게임 자체가 꽤 오래 개발하던 작품이다 보니 개발 과정에서 다들 너무 익숙해져서 난이도를 조절할 생각을 미처 못 했죠. 그래도 여러 화면 분량의 대형 전함 보스나, '액슬레이' 스타일의 3D 스크롤을 구현하는 등 기술적으로는 여러 시도를 했는데, 이번에도 유통사 문제로 또 고생했어요. 용산의 신생 유통사였는데, 그 회사의 본업인 플로피디스크 복제생산이 CD-ROM 시대로 흘러가면서 기울어진 게 문제가 됐어요. 결국 어디스를 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 유통사는 접혔고, 계약된 개런티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어요. 또 한 번의 실패였죠.

어디스(1994년). 내부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개발됐던 작품으로서, '여러 화면 분량의 초대형 보스' 등을 특징으로 내세웠다. 남상규 씨 자신이 과거 냈던 앨범 'NF43'을 소량 재생산해 초회 특전으로 함께 동봉한 것도 특징

이후에도 '메카탐정 반슬러그' 등 여러 게임을 내시긴 하지만, 결국 폭스레인저 당시의 명성을 회복하지는 못했는데요.

게임은 계속 만들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음악 활동으로 제가 번 돈을 게임에 붓는 식이어서 별로 보탬은 되지 못했죠. 다 완성해놓고도 유통사를 잡지 못해 결국 미발매로 끝나버린 '박스레인저 리턴즈'만큼은 지금 생각해도 참 아까워요. 슈팅 게임 '뷰포인트'의 쿼터뷰 스크롤에서 깊은 인상을 받아 우리 기술로 그걸 구현해보자 하고 개발한 작품인데, 메카탐정과 동시 개발했었지만 결국 그것도 유통 관련 트러블로 발매하지 못했죠. 여러 유통사를 상대하면서 좋게 끝난 적이 없어서, 음악계보다 더하구나 싶은 느낌이 들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폭스레인저 3도, 결국은 그리 화제를 일으키지 못했는데요. 장르가 갑자기 로봇 액션 게임으로 바뀌어서, 당시 게임잡지 기사를 다시 들춰보면 '원래는 삼성전자의 투자와 기술지원으로 수퍼알라���보이용으로 개발 중이었지만 PC 게임으로 전환했다'라는 느낌이었는데, 사실인가요?

아니에요. 처음부터 PC용으로 개발했던 작품입니다. 왜 기사가 그렇게 나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추측하기로는 아마 삼성전자 측에서 수퍼알라딘보이용으로 국산 게임이 개발 중이라는 것을 어필하려다 보니 저희 게임을 같이 내세운 게 아닌가 싶어요. 장르를 바꾼 이유는 일단 큰 변화를 주고 싶었던 것과 당시 유통 쪽에서 슈팅 장르를 꺼렸던 것, 그리고 당시 제가 인상 깊게 즐겼던 '제노사이드 2'의 영향이 컸기 때문일 거예요.

2편에서 너무 큰 타격을 입었기에 3편만큼은 완성도 면에선 타협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정말 심혈을 기울였던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게임도 어김없이 유통사 트러블이 걸렸죠(일동 웃음). 이번엔 제가 경영에 어두웠던 탓에 선뜻 어음으로 결제받은 게 문제가 됐어요. 유통사가 아예 부도가 나는 바람에 저에게까지 차압이 들어와서, 아 이젠 정말 끝났다 싶었죠.

1995년 여름경 여러 게임잡지에 게재되었던 광고. 폭스레인저 3와 박스레인저 리턴즈(미발매작)를 함께 묶어 광고한 것이 특징이다

저런...

왜 게임에 뛰어들었을까도 싶었는데……. 그래도 고맙게도 회사의 개발진들이 떠나지 않고 남아줬어요. 게다가 천운이 있었는지, 가벼운 친분이 있었던 일본 친구가 "우리 회사의 사업부에서 일을 만들어줄 테니 일본 회사의 외주를 해보는 건 어떤가"라고 선뜻 도와주었어요. 이를 계기로 일본 회사들과 거래관계를 트게 됐고, 그때부턴 한국보다는 일본 쪽 외주작업에 더 역점을 기울였죠. 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소프트 액션 자체 개발작품이 한국에 거의 나오지 않은 건, 그게 이유입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테니, 차라리 일본 회사를 상대하는 게 편하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일본 회사들은 적어도 비즈니스적으로는 깔끔하게 협업이 가능하니까요. 한국에서 유통사나 이통사에 워낙 시달렸다 보니, 결제가 늦어져도 사전에 대처할 시간을 주는 등 최소한 금전적으로는 매우 깔끔한 일본 회사들 쪽이 차라리 더 일하기 편했어요.

당시 일본 회사들과의 외주작업 중에서 밝힐 수 있는 거라면…… 역시 윈도우판 '랑그릿사' 시리즈일까요. 아까 말씀드린 그 일본 친구의 소개로 메사이야, 즉 NCS 사의 부장과 만나게 됐는데, 당시는 한국 게임사가 일본에선 완전 무명이던 시절이라 처음엔 백안시당했어요. 랑그릿사 1편의 윈도우용 이식 건이었는데, 심지어는 개발자료로 원작의 소스나 애셋은커녕 소프트 하나와 공략본 한 권 주더라고요(일동 폭소). 원작을 역분석해 그냥 우리가 다시 만들다시피 해서 데모를 보여줬더니, 그제야 태도가 달라지더군요. 덕분에, 그 부장이 나중에 메사이야 IP를 가져가 신 회사인 크로스노츠를 설립한 이후에도 계속 관계가 유지됐어요.

PC판 랑그릿사 시리즈가 사실상 소프트 액션의 작품이라는 얘기는 종종 들었죠.

PS2판 '중장기병 발켄'도 우리 회사가 관여했었는데, 실은 원래 일본 내에서 하청 개발했던 업체가 도산하는 바람에 발매계약 완수를 위해 저희 쪽으로 SOS가 와서, 소스 데이터도 없이 불과 4개월이라는 촉박한 기일 안에 어떻게든 만들어냈어야 했던 뒷얘기가 있어요. 한국어판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죠. 그 게임도 개발자료라곤 원작 소프트와 공략본뿐이었지만요(웃음). 결과적으로는 그리 좋은 퀄리티가 아니었으나, 그래도 완성은 시켜줬으니 판권사 측에서는 매우 고마워했어요.

그 외에도 일본에서 피처폰 게임이 인기이던 시절, 피처폰 게임에 3D 엔진을 도입해 i-mode 등으로 '아머드 코어' 관련작을 개발하는 등 여러 작업을 했었죠. PS1용 게임도 알게 모르게 많이 작업했었고. PS1으로 국내에도 발매됐던 '곰돌이 푸' 시리즈 두 작품의 한국어화도 우리 회사가 담당했어요.

국내에도 정식 발매된 윈도우판 '랑그릿사' 시리즈(1~3ㆍ밀레니엄)와 '그로우랜서'도, 소프트 액션이 이식개발을 맡았던 작품이다(사진은 랑그릿사 1편)

그래도, 결국 2008년경에는 회사를 접게 되셨죠.

오랫동안 게임회사를 경영하면서 많이 지치기도 했고, 일본 게임업계 외주가 모바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일본 이통사들과 엮이는 일이 많아져 피곤해진 탓도 있고요. 한국 이통사를 상대하면서 또 많이 고생했기에, 한국에는 더 이상 게임을 내고 싶지 않아졌기도 했어요. 당시엔 앞으로의 회사 진로를 놓고 온라인 MMO 게임이냐 PS2로 대표되는 콘솔 게임이냐의 두 기로를 고민해야 했지요. 실제로 SCEK가 PS2 국내 서드파티에 개발툴을 보급할 때 제일 먼저 받아온 회사 중 하나가 저희예요. 그런데 딱 그때쯤 일본 피처폰 쪽 일이 대폭 늘어나면서 PS2로의 진출 기회가 늦어졌고, 온라인 게임계도 거액의 투자를 받아 대형 MMO 게임을 내는 풍조로 바뀌면서 역시나 우리 회사가 가기 어려운 길이 되었죠. PS2도 게임 만들기 쉬운 플랫폼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여기서 끝내고 업계를 은퇴하는 길을 선택했어요.

2005년 일본에서만 서비스된 피처폰 게임 '아머드 코어 모바일 2'는 사실 소프트 액션이 기획ㆍ개발한 작품. 당시로는 드물게 3D 그래픽 엔진을 자체 구현했다고 한다
당시 소프트 액션이 개발한 일본 피처폰 게임 중 일부는 국내에도 한국어화로 소개되었다(사진은 '킹스 필드 모바일 Ⅱ')
당시 국내 이통사들이 추진하던 이른바 '게임폰' 플랫폼을 바탕으로, 여러 3D 모바일 게임을 'WAKYTOKY'라는 자체 브랜드 하에 개발ㆍ발매하기도 하였다

폭스레인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파란이 정말 많으셨습니다만, 그래도 휴업 후 어느덧 15년쯤이나 시간이 지났는데 과거를 되돌아보실 여유가 있으셨는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동안 딱히 과거에 대한 미련은 없었고 그냥 잊어버린 채 살았어요. 이젠 회사도 팀원도 없고, 기타 실력도 예전 같지 않고 시대도 많이 변했고. 그러다 최근 들어, 폭스레인저 재발매 건으로 빅콤 사장님과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하면서 새로 마음이 생겼달까요. 국산 레트로 게임이 다시 빛을 보는 것에 정말 열정적이신 분이어서, 그럼 다시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그럼, 폭스레인저를 리메이크하거나 신작을 내거나 하는 흐름인가요?

아직 구체적인 기획은 없지만, 뭔가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된다면 최소한 음악만큼은 제가 직접 참여하고 싶죠. 게임 자체는 워낙 지금 시대엔 낡은 작품이니까 지금의 기술과 감성으로 새로 만들어야겠지만, 여건이 된다면 제가 젊었을 때 동경했던 일본의 90년대 게임 개발자들이나 게임음악 작곡가들을 다시 섭외해 함께 작업해보고도 싶어요. 그분들 중 아직 현역이고 외주도 활발히 받는 경우가 여전히 많거든요. 저 자신이 일본과 협업해본 경험이 많다 보니 그쪽 시스템을 잘 이해하고 있기도 하고요. 여차하면 내가 발주하면 되지 뭐(일동 웃음).

 

자신의 원점인 사람들과 함께 신작 게임을 만든다는 것도 상당한 로망이네요.

저도 초창기부터 게임과 함께해온 게임 키드니까요. 일본은 8~90년대 황금기에 게임을 개발했던 원로 개발자들이 아직도 현업에 있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물론 이제 연로하셔서 돌아가신 분들도 적지 않지만요. 몇몇 분과는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지내기도 하는데, 그런 분들과 다시 의기투합해서 뭔가를 해볼 수 있다면 재미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한참 지나고 보니, 아 그때 저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걸, 그땐 왜 그런 걸 몰랐을까 싶은 게 많아지더라고요. 현업 시절에 실패도 많았고 시행착오도 많았으니, 나이가 든 지금은 좀 더 나은 방향을 고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앞으로 폭스레인저가 IP로서의 새로운 생명을 얻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도 무척 뜻깊은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직접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리고, 끝으로 폭스레인저를 기억하는 독자 여러분께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폭스레인저는 지금 보면 서툰 점도 어설픈 점도 많은 게임이었지만, ‘최초의 국산 게임’이라는 상징성과 시대의 요청에 적시에 부응한 발매 타이밍 등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분의 추억 속에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저와 당시 개발진들의 노력과 고생의 결정체인 폭스레인저라는 작품이 앞으로도 여러분께 좋은 추억과 기억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30년이나 이 작품을 기억해주신 한국의 모든 올드게이머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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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레인저

Soft Action | 1992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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